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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군. 시사에 눈을뜨다...

쏭군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건 내 나이에 비해 좀 오래되었다.
초등학교때부터 새벽 신문배달을 해온터라 조중동은 물론 한겨레와 경향. 그외 지방신문까지 오래도록 봐온터라 관심이 안갈래야 안갈 수 가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정치 모임을 참여하는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또래에 시사에 관심있는 친구는 극히 드물었고, 그런 모임을 하는곳도 드물었다.
종종 검색을 통해 정치모임을 찾아서 가보긴 했지만 연령대가 안맞아서도 있겠지만 좀체 내 의견을 발언할 기회도 적었고 들어줄 환경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에 관심을 접고 각종 친목모임 운영진도 해보고 운영자로써도 1~2년 모임을 가져보았지만 술자리에서 잠깐. 아주 잠깐 언급되는거 외엔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는 쉽게 파고들기 어려운 .. 그리고 서로 언급을 피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던중 2010년 6.2 지방선거는 내게 큰 변환기를 주었다.
관심이 컷던 선거였기에 자원봉사를 신청했고 우연한 기회에 선거사무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6.2지방선거때 선거사무원 활동했던 쏭군

당시 김정길 부산시장후보는 민주당 간판을 걸고 44.6%라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졌지만 이긴 선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신 낙선인사를 할때 만난 김정길 전장관은 많은사람이 졌는데 웃으라고하니 표정관리가 안된다고도 했었다.

그렇게 지방선거의 여운은 조금씩 뒤로 뒤로 밀렸고, 나 역시 생업이 1순위인 일반 서민이었기에 서서히 마음속 열망도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던중 터진일은 바로 '한진중공업 파업' 사건이었다.
쏭군의 거주지가 한진중공업이었고 집에서 창문을 열면 보이던곳이 한진중공업이다.
선거사무원으로 활동했던것을 계기로 당시 함께 운동을했던 지인들을 통해 한진중공업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단순 파업인줄 알았던 이 사건은 내가 창밖에서 보던 크레인위에 누군가가 고공 농성을 벌인다는 사실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한진 중공업사태의 본질을 알아가기 시작할 무렵 출근길 집을 나서다 찍은 한진중공업 전경.

'김진숙'이란 이름을 알고 '희망버스'에 대해 알아갈수록 기성 언론에 대한 분노는 커져갔고 한편으론 무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도 주민인 나부터 내가 사는 곳의 문제에 외면한다면 안되겠단 생각이 먼저였던거 같다.
그래서 트윗 타임라인을 주시하며 조금이라도 급박한 분위기만 조성되면 스쿠터를 타고 바로 가서 현장을 주시했다. 트윗 현장중계도 그때 처음 시작했었다.

2011년 6월 27일 행정대집행 당시 크레인앞에서 농성중이던 노조원들을 집행조끼를 입은 용역들이 끌어내고 있다.

 행정대집행 바로 다음날 끌여나온 노조원들을 비를 맞으며 85크레인 맞은편에서 농성을 진행했고
 이들에게 김치전을 구워주시던 분과 연대하던 시민의 모습.

이때가 희망버스가 오기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의 이벤트를 보고 착안한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리허그는 한국에 프리허그가 상륙한 초창기부터 꾸준히 해왔던 캠페인이다.

 11월 10일 (맞는지 모르겠네 ^^;) 마침내 김진숙 지도위원이 내려왔다.
 

이때 쏭군은 요로코럼 링거와 무통주사까지 맞으며 투병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별거겠나. '거다란'님께 부탁해 픽업을 받아 현장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생환을 목도할수 있었다.
 


이 미소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였을까. 그후 쏭군도 나루토급 회복력을 보이며 퇴원 할 수 있었다.

이때 느낄 수 있었던건 나꼼수 김어준 총수의 말마따나 나와 같은 생각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사람이 너무나 많다는것을 깨달았다는것이다.